게임에 참여하세요, <인사이트 밀>

The Incite mill 인사이트 밀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구상할 때 그 어떤 작품보다 많은 시간을 들였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정교한 살인극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수많은 후배(?)를 양산해냈죠. 아니나 다를까, 최근 클로즈드 서클을 테마로 한 두 권의 작품이 소개됐습니다. 한 권은 곤도 후미에의 ‘얼어붙은 섬’ 또 하나는 소개하고자 하는 요네자와 호노부의 ‘인사이트 밀’입니다. 한 권은 작가의 데뷔작, 또 한 권은 작가의 최신작입니다. 추리소설의 세계에 처음 진입할 때도 또 진행형일 때도 여전히 선택되는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테마.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에게 한없는 존경을 보냅니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가도카와 학원 소설 대상으로 데뷔, 라이트노벨로 시작한 작가입니다. 국내에도 ‘소시민 시리즈’ 두 권이 소개된 적이 있죠. 원서를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이 작가를 좋아하는 분이 상당히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쉽게도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거의 주목받지 못해서 작품에 비해 소개가 지지부진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인사이트 밀’ 즉, ‘인시테미루’는 출간 당시 일본에서 상당히 주목받았던 작품입니다. 일상의 미스터리를 주로 다루던 작가가 야심차게 시도한 ‘본격’ 작품이라는 점도 있었고, 더 이상 찾아낼 구멍이 없어 보이는 ‘닫힌 섬’을 테마로 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일본 출간 당시 시놉시스를 보고 상당한 호기심이 일었고 독자들의 반응도 아주 좋아서 내심 기대하던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200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에서 10위를 차지했는데요. ‘사사키 조’ ‘아리스가와 아리스’ ‘미야베 미유키’ ‘곤노 빈’ 등 익숙한 거장들이 그 위로 포진하고 있으니 78년생인 젊은 작가로서는 상당히 선전한 것이죠(작품을 다 읽은 지금, 좀 짜지 않았나 싶기도 하구요. 이런 작품이 10위라니; 일본의 미스터리 전통은...).

패러디에 가까운 오마주랄까요, ‘인사이트 밀’은 대놓고(?) 비슷하게 시작됩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시작 부분, 10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모이게 되죠? ‘인사이트 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급 112,000엔(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130만 원이 넘으려나요?)을 준다는 엄청난 고액의 아르바이트. 연령과 성별 불문하고 어떤 시험에 24시간, 7일을 참여하면 고스란히 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거죠. 참가자는 모두 열두 명, 그들은 반신반의하며 십각관을 꼬옥 닮은; 실험장소 암귀관에 모이게 되죠. 접근을 알 수 없도록 물결 모양으로 설계된 회랑 사이에 위치한 각자의 방은 잠글 수 없고, 자신의 카드키로 열 수 있는 상자 안에는 흉기가 하나씩 들어 있습니다. 흉기는 고전 추리소설 속에 사용된 흉기들. 화자 유키에게는 ‘얼룩끈’의 부지깽이가 주어지죠.

닫힌 공간, 완벽한 통제 하에 참가자의 동선을 제한하는 규칙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보너스가 있죠. 참가자를 한 명 살해하면 전체 보수의 2배 그것도 누적. 살해당한 사람은 1.2배, 정확히 범인을 지목한 탐정은 전체보수의 3배에 누적, 조수는 1.5배, 증인은 건 당 10만 엔 등등. 자, 열두 명의 참가자는 평화롭게 24시간, 7일을 버텨서 각각 18,816,000엔씩 사이좋게 차지할까요? 천만의 말씀, 암귀관 안에는 열 개의 관이 놓인 '시체 안치실‘까지 마련돼 있습니다. 당연히 살인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설정 참 기가 막힙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물론, ‘모든 것이 F가 된다’ ‘십각관 살인사건’ ‘배틀로얄’ ‘도박묵시록 카이지’ ‘큐브’ 등을 몽땅 비벼버린 듯한 이 작품. 과연 어떨까요?

이야기 자체는 너무나도 익숙하죠. 모이고 갇히고 서로 불신하며 죽어나가겠죠. 누군가는 범인이고 누군가는 탐정일 테고요. 하지만 요네자와 호노부는 이 익숙한 구조를 놀랍도록 흡인력 있게 만들어 놓았어요. ‘게임화’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방마다 비치된 ‘룰북’을 통해 암귀관에서의 실험을 하나의 게임으로 변화시킵니다. 규칙, 금기와 허가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아이템을 적절히 드러내고 숨겨서 흥미 있는 미스터리를 이끌어내죠. 거기에 시점의 장난스러운 활용도 참 절묘합니다. 열두 명의 참가자를 소개하는 장면이 있고난 후 화자 ‘유키’는 이런 식으로 독백합니다. ‘그런데 저 구부정한 남자의 이름은 뭐였지?’ 독자는 화들짝 놀라며 앞 장을 살필 수밖에 없죠. 요네자와 호노부는 게임화와 유키의 시선을 통해 계속해서 독자를 유혹합니다. ‘이 흥미진진한 게임에 어서 참여하라고’. 작가는 읽는 독자를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커뮤니케이션하고 싶어 하죠.

‘클로즈드 서클’은 잘 차려진 밥상입니다만 양날의 칼이기도 합니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이 위험한 함정을 멋지게 뛰어넘습니다. 작품의 유일한 단점은 작위성이지만 장점 역시 작위성입니다. 초창기 신본격 작가들이 어쩔 수 없는 작위적인 설정으로 고민했다면 요네자와 호노부는 아예 ‘작위’에 몸을 맡기고 새로운 감각으로 포장합니다. 공정한 단서로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의 미덕도 놓치지 않으면서요.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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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cca | 2008/08/30 23:23 | from 하우미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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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우사미 at 2008/08/31 02:58
저는 <십각관...>의 엘러리처럼 추리소설이란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요 :) 제 취향에 맞는 소설일 것 같네요. 더구나 고전 추리 소설에 대한 오마쥬 내지는 패러디도 들어있는 것 같으니, 엄청 기대됩니다 ^^
Commented by decca at 2008/08/31 21:57
그럼 딱 좋아하실 작품이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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